전시서문
산은 오래도록 인간에게 경외와 위안의 대상이었다. 때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존재로, 때로는 모든 것을 품어주는 침묵의 품으로 우리 곁에 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설악산은 강인하면서도 깊은 표정을 지닌 산이다.
험준한 암봉과 유장한 능선, 안개와 바람이 빚어내는 풍경은 단순한 경관을 넘어 하나의 정신적 풍경으로 다가온다.
여홍구의 개인전 《설악단상: Fragments of Mt. Seorak》은 그 설악의 본질적 기운을 화면 위에 길어 올린 작업들로 구성된다.
작가는 오랜 시간 ‘산’을 주제로 탐구해 왔다. 그러나 그의 산은 특정 장소를 기록한 풍경화가 아니다.
눈앞의 형상을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산이 품은 생명력과 에너지, 그리고 그 앞에 선 인간 내면의 감정을 포착한다.
화면 속 검은 먹빛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응축된 시간이며 침묵이고, 자연이 내뿜는 거대한 호흡이다.
번짐과 스밈, 농담의 층위는 암벽과 계곡, 구름과 물안개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추상적 감각의 세계로 관람자를 이끈다.
여홍구는 동양화의 선적 감수성과 서양화의 면적 조형성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회화 언어를 구축해 왔다.
화선지 위에 스며드는 먹의 물성은 전통 매체의 깊이를 품고 있으면서도, 대담한 색면 구성과 강렬한 대비는 현대적 감각을 드러낸다.
그의 작업은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 재현과 표현이라는 경계를 넘어선다.
중요한 것은 형식적 구분이 아니라 화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감동의 진실성이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서로 다른 산의 얼굴을 보여준다.
어떤 화면에서는 거대한 암봉이 침묵 속 위엄을 드러내고, 또 다른 화면에서는 번지는 여백이 고요한 명상의 공간을 연다.
폭포의 리듬, 깊은 계곡의 적막, 능선을 감싸는 바람의 결까지 각기 다른 풍경과 정서가 한 폭 한 폭에 응축되어 있다.
관람자는 그 앞에서 단지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느끼고 산과 호흡하게 된다.
《설악단상: Fragments of Mt. Seorak》은 자연을 바라보는 전시이자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여홍구가 빚어낸 먹빛의 산세 속에서 관람자들은 잠시 일상의 소음을 내려놓고, 깊고 장엄한 사유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될 것이다.